잡스런 잠늠이 어디선가 줏어듣기로, 철학적 난제중의 하나가 타인의 마음...이라고 한다. 하기사 남 생각 할 것 없이 나의 마음이란것 자체가 논란이 전혀 없을
정도로 분명한 이해는 아직 없는 분야라 할텐데, 한술 더떠서 남의 마음이란게 무엇인지 설명하기란 어려울 수 밖에 없겠다.
엥간하면 니꺼건 내꺼건 마음=뇌 라는 주장에서부텀 타인들=지옥이라는 주장까지 잇겟냔 마리지...+_+a
그렇다고
남의 마음에 대해 분명한 사실이 전혀 없는것도 아니다. 다른사람이 눈에 보이거나 부딛힌다던지, 그들이 나를 괴롭히거나 돕거나
하는 경험은 <타인도 나처럼 마음(으로 부를찌 말찌 하는것)이 있다>는 것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지옥보다도 훨씬
더) 분명하다. 설령 뭔지는 모르고 설명도 못하겠다 하더라도 최소한 남들도 마음이라는게 있다는건 분명하다는 것이겠다. 가령 내가
어떻게 생각하건 살아있건 죽고없건 <지구라는 행성이 있고 내가 그위에 산(살았)다>거나 <사람은 다
죽는다>처럼 누구에게나 분명한 것, 소위 '公적실재public reality'로 중복?재차?강조하여 표현되는 것 쯤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것조차도 회의하고 부정한다면, 잠늠으로선 그건 회의하는 사람 개인의 문제이지 세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니맘대로
하세요..하고 걍 냅둘수 밖에 없다.
근데 이 마음이 뭐냐 하는 문제를 데카르트처럼 내마음을 기준으로 삼아
언어적이성을 통한 개념적접근이랄찌 성찰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중요하고 또 필요하지만, 남들이 나를 더 잘 안다든지,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동일성은 타자를 전제하는 것이래나 뭐 그런말도 있듯이 타인의 마음을 이런 '공적 실재'로서 대상화하여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도 하나의 가능한 접근방법이겠고, 심리학이란 과학이 바로 그런거겠다 (전통적 심리학이나 진화심리학은 이와는 또 쫌
다릇타고 잠늠은 본다). 그래서 얻게 될 인간과 그 마음에 관련되는 듯한 지식들 역시 지구가 둥글다는 지식처럼 하나의
공적실재로서 그 위에 쌓여나갈 생각이나 말, 소통의 근거? 출발점?으로 기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문학-미학과 철학 심지어 사회과학까지도 이어주는 연결고리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는 감정이입(으로 번역되지만 그보담 훨 넓은 의미인)
empathy의 이해에는 8-90년대에 발견된
거울뉴런mirror neuron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물질적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잠늠식으로 말하자면 거울뉴런들이 구현하는 시뮬레이션-흉내내기 기능은 얼마든지
반증가능한 설명이며 따라서 지식을 쌓아나가는 물질적 토대-출발점이 될수있다는 점에서는 소위 라깡식의 설명보다 (덜 상징적인지는
몰라도) 더 유용한 것으로 내겐 보인다. 가령 감정이입의 맥락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할 자폐성장애?Autism Spectrum
Disorders, ASD는 이 거울뉴런의 기능혼란dysfunction과 연관이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모르긴몰라도 유체역학에서 시작한 비트겐시타인이나 수학에서 시작했다는 훗설이 생전에 이런 신경과학적 지식을 접할수 있었다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궁금해지기도 한다.
만약 의식-마음이란 개념이 이처럼 뇌나 뉴런-신경계통, 감각-근골계 등의 신체기관, 이런 물질적-공적 실재에 전혀 근거하지도 않고
상관도 없는 별개의 것이었더라면 인간 내지 인간의식의 활동은 모든것은 본질적으로 상대적인 것(이거나 신이 다 알아서 하는
것+_+;)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물론 이런 공적실재에서 근거를 찾고 이해하기, 혹은 일반적으로 자연화naturalization, 가 전혀
없이도 (중세시대의 종교의 경우에서와 같이) 사회화socialization를 통해 어느정도 (가령 통념이라던가 이데올로기라던가
그런 방식의) 의미의 공공성은 생겨날테고 그래서 완전 상대화는 불가능해지겠지만, 임의적이라는 성격은 여전히 남는다.
그렇다고 마음을 완존 단순무식하게 자연화해서 뇌나 신경계통과 전적으로 동일한 것이라는 것도 여전히 화를 자초하는 생각이다. 이런류의 생각이 지닌 함정은 설의
중국방논증이나 네이글의
박쥐논증과
같은 주장 뿐 아니라 사회생물학과 관련한 논쟁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모르긴몰라도 아마도 인간은 생물적-種적 존재이기만 한게
아니라 (제2의 자연이란 말도 있듯이) 사회적 내지 심지어 '상징적' 동물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로 이런 정의는 모든 개개인간에게도 하나하나 늘 딱 맞아떨어져야 할 이유가 사실 전혀 없다,)
이처럼 대조적인 속성들로
구분하고 나눠볼 수 잇다고 해서 실제로도 반드시 서로다른 두개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문제로 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빛-어둠의
대조처럼 구분하면 유용하지만 실제로는 빛과 어둠이 각각 모두 공적실재인것은 아니다 (빛만 실재고 흔한 말로 어둠은 빛의 결여?
상대적으로 부족함?이다). 수학에서도 앞뒤, 안밖의 구분이 무의미한 공간구조의 가능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결국
내 마음이나 타인의 마음의 물질적 근거는 물질적 근거일 뿐, 꼭 그 의미의 전부는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라플라스가
뉴톤역학으로 우주의 운명을 계산해서 보여주겠다고 큰소리칠때에도 초기조건을 달라고 조건을 달았다. 그 초기조건이라는게
엿장수마음대로 임의적?이고 불특정한 것, 내지 지금세계를 완전 기술하는것이 지금 불가능?한것처럼 그때세계도 역시 불가능한 것...이지만 (그래서 동어반복적 성격이 강하지만), 이후의 운동과정이나 결합과정도 사실은 안개처럼은 아니더라도 난시나 안경벗고보는것
처럼 뿌연 것이다. 양자역학은 물질의 운동에는 불확정성이 포함된다는것이 자연의 속성, 즉 공적실재임을 보여주었다.
세계자체가 이미 지닌 속성인듯한 이러한 애매함에 더하여, 반대로 생물체로서 인간이 지닌 감각한계 역시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빈 공간인 이런
원자집합체를 '형상과 표면을 가지며 속이 물질로 가득찬' '물체'의 애매한? 이미지로서 인지하도록 우리의 직관을 유도한다, 삼원색이라는
것도 공적실재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기능의 여건으로 인한것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또 우리가 폭이나 굵기가 없는 선이라 인지하는
것도 가까이서 자세히보면 가령 수도호스같은 구조가 있고 그안에 들러붙어 사는 벌레에게는 면으로 기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고기떼. 출처: www.2kiwis.co.uk
인간성도 드럽은 공도리잠늠 주제에 이런 개 풀뜯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꺼내서 읊는 이유는, 이름하나 폼나는 비트겐시타인의 주장인 언어적 의미는 언어공동체내에서의 그 용도라던가
삶의 형식이라던가 하는 이런 이야기들이 때로는 엉뚱하게도 '모든' 현실이 다 사회구성물social constructions이고
객관적으로 정해진건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극단적으로 상대적인 입장을 주장하는데에도 가끔 동원되는것을 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과학에도 그런 입장이
있다). 물론 잠늠은 그런 입장들도 공적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에 대한 객관적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것이라 이해하고, 나름 일말의 진실이 없진 않다고 여기는 편이다.
그러나 객관성에 어떤 절대성이나 필연성 같은 어떤 형이상학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공공성 정도로 파악한다면 그런 문제도 생기지
않으면서 여전히 유용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물들이나 외계인들에게는 미안하다. 이따 숨좀돌리면 보자 -_-a;;;). 잠늠이
흄식의 회의론을 과학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축복으
로 여기는 것도 그때문이고, 비트겐시타인도 자신은 자연화나 과학적 개별지식이 별로 매혹적인 작업으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했을
뿐이지 그것을 숫제 부정한적은 글쎄...없엇던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가령 소통은 결국 공공성을 지향하는 것이고,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는 결국 공적 실재일 것이다.
다행히도 그것은 늘 저기에 있고, 그중에는 익명의 타인들도 있다.
그게 잠늠의 믿음이라면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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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아니 이게 무슨 쓰나미 처음 났을때도 아니고, 우째 대책을 미리 안생각해놨단 마리야~~~ 했었는데, 완전 동감입니당.
자기도 모르게 자기생각과는 달리 해당 집단의 지배적인 문화에 따라 널리 쓰이는 말투?어법?사고습관?이 부지부식간에 자동으로 튀어나왔을 뿐일 수도 있다-- 요런 상황이기를 살짝 기대합니다만..
정부야 때되면 바뀌지만 공무원은 그대로이니 그게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ㅠㅠ
싫.음.말.고.에 저는 방점을 찍고싶슴다. 그들이 대비하려는 의지가 있을까요. 어디. 그냥 그 자리에서 오래오래 밍기적거리고만 있고싶겠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