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기사들을 보면 참...넘사스럽다. '말이되는 적이 말이안되는 친구보다 낫다' 뭐 그런말도 생각나고, 단순한 개인차원이 아니라 사회 내지 국가차원에서조차 사실에 대한 눈꼽만한 관심도 없다 보니 사실을 대하는
조차 되어 있지 않은게 너무나 뻔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결과가 원인보다 먼저 벌어질 수 없다거나 사람은 죽고 돌멩이는 죽지 않는다, 이런것들은 선택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다.
선택적으로 듣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편리할 때도 있지만, 치명적일 때도 있다. 그 치명적인것을
면하기 위해서는 선택이 아니라 (사실의) 강요에 대한 굴복?이 될 수 밖에 없다. 뭐 어찌됫건 분명한것은, 그런자들에게 사실이나
과학, 내지 자아나 인권 뭐 이런건 그닥 큰 의미가 없을꺼라는 것이다.
물론 이해나 기억이, 근본적으로는 언어적
의미라는 것이, 선택 내지 근본적으로는 문맥과 전혀 무관할 수는 없다. 이말을 뒤집으면 모든 언어적 의미가 다 선택의 대상인
것은 아니라는 말도 된다.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는게 요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는게 어렵거나 무의미해지는
영역이 없는것도 아니다. 가령 시나 미술의 표현을 두고 사실관계를 따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실관계를 따져야 하는
경우임에도 사실인지 의견(표현)인지 애매해지는 경계영역이 분명히 있다. 내생각에 이것은 사실이란 개념이 인간의 지각한계 이내에서
만들어진 개념이기 때문인 듯 하다. 그 바깥쪽에 '있는'^^ 사실들은 지각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는 의심?회의?에
취약하다. 가령 양자역학적 미시세계가 그렇고, 우주론적 내지 진화론적 거시세계가 그렇다. 지각의 시공간적 한계뿐 아니라,
개별사안과 대비되는 전체?보편?사안 내지 통계적사안, 나아가 타인의 존재 내지 그 마음 등등에 대한 회의나 의심도, 인간과 그
의식의 지각작용이 갖는 개체적 한계와 관련이 있을것이다.
그
러나 그런 경계영역의 문제가 아닌데도 사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사실에 대한 관심을 차단-억압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아니 상당히 많다. 이는 비단 최근에 가라앉은 어떤 배라던가, 보나 댐으로 물길을 막는것의 결과?영향?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에게 자원봉사를 요구할 수 있느냐 등등의 인간의 삶 전반에 걸친 문제이기도 하다. 왜냐면 소통은 사실관계의 공유가 그 첫걸음이고 사실에 대한 관심의 억압은 소통의 부정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당근 부나 힘에 대한
타인들의 관심을 사갈시-배제하고 독점하려는것은 전혀 자연스러운 결말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결국 사실에 대한 관심이란 내눈에 보이는 것, 내몸으로 겪은 것에 대한 관심
이라기보다는
설령 남의 눈이고 남의 몸이라 할지라도 역지사지나 뭐 그런식으로 (알 권리가 보장되고 필요한 교육이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으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고 동의할 수 있는 추론과정, 즉 공공성의 정당화에 대한 관심이라 보아도 크게 문제는 없지 않나 싶다.
사실의 문제는 자아의 문제와 동전의 앞뒤를 이룬다 난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사회는 논쟁적이고 고집센?
개인들-
당사자들이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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